1. 작가님, 하지만 이해해요.
어디가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나는 책을 다독하는 사람이다. 물론 자랑삼아 양을 늘리려고 애쓰는 독서도 아니고, 나의 독해력이 평균 이상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어디가서 나의 평균적인 독서량을 말하기는 영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많이 읽으면 늘어나는 몇가지 능력이 있는데, 내 경우에는 서문을 보고 책을 평가하는 기술이 그렇다.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를 보고 작가의 깊이나 책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은 꽤 대중적이고 평범한 기술이겠지만, 어떡하겠나. 내가 체감하는 나의 독서 경험치 상승은 그런 사소한 몇 가지로 제한되는 것을. 그리고 <우아한 가난의 시대>의 김지선 작가는 나의 그 평범하고 근거없는 능력의 수혜자였다. 84년생, (나와 4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영화지와 패션지 에디터 경력(나는 그쪽 분야를 거의 모른다), 에세이. 이 3가지 조합은 나도 모르게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갖게 만든다. 거기에 아담한 크기의 하드커버 양장이라니. "또 깊이 없는 그저 그런 에세이가 그럴 듯한 제목으로 하나 나왔구나" 내가 처음 이 책을 보고 든 생각이였다. 그런데 서문을 보고 나는 그만 울컥 해 버렸다.
월마다 통장에 꽂히는 금액은 적을 지언정, 음식은 맛집에서 먹는 우리 세대의 '우아한 가난'을 칼럼으로 소개했던 작가의 글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방만한 가난을 말한다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례다."
작가는 이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심기를 내가 가장 원칙으로 거슬렀다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자조 혹은 동세대의 생활 양식을 말하기 위한 표현이 안 그래도 추운 겨울에 어떤 이의 마음을 더욱 싸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고 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통쾌함과 연민의 알 수 없는 콜라보를 느꼈다. 그렇다.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과 소소한 행복이 누군가에겐 그토록 소망하는 특별한 경험일 수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은 뒤 곧바로 집어든 책이라 그런지 이 책에 대한 내 첫 반응도 누군가와 비슷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지독한 가난을 겪은 세대도 아니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도 않았지만 작가가 가져온 '우아한 가난'이라는 말은 그저 어느정도 배부른자들의 불평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뒤로 다시 찾아온 감정은 위에 말한 연민이자 공감이였다. 작품 내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내 생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소비도 꽤 있으시지만)
그런 소비들을 내가 우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우아함이라는, 평소 나와 맞지 않는 명사를 제외하고 나면 내가 느낀 감정들은 김지선 작가가 느낀 그것과 매우 닮아있었다. 그래서 작가가 '가난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을 따지기 이전에,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각자의 풍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라고 용기를 낸 것에 박수를 쳤다. 타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아하지 못한 인생일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느니 '조금 나쁘지만 우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낫다.
이렇게 서문으로 한 작가에 대해 깊이 공감한 적이 있었던가? 앞으로 본문에서 그가 무엇을 말하던 간에, 나는 꽤나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꽤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주변의 '우아한 가난'을 걱정하며, 동시에 누리는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었다. "야, 그냥 그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 라고.
2. 씀씀이를 이렇게 잘 표현하다니
<우아한 가난의 시대>는 김지선 작가가 틈틈히 쓴 칼럼들을 모아 놓은 일종의 단편집이다. 젊은 세대들의 소비를 자기만의 언어로 잘 나열했다는 점이, 그리고 그 정의가 나도 모르게 끄덕거려진다는 것이 매력인 작품이다. 내가 평소 하던 추상적인 느낌을 정제된 언어로 공감가게 '설명'하고 '정의'해주는 사람은 '힙'하다. 왠지 댓글로 22222222222222를 남기고 싶은 느낌이다. 범람하는 아무개들의 에세이를 그렇게나 싫어하는 나도, 사람들이 '글'의 매력에 빠져드는 모습을 볼 때면 저런 작품들도 의미가 있겠거니 하고 넘겨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가성비'와 '미니멀리즘' 대한 그의 설명이 그랬다.
"가성비는 이 물건과 저 물건을 모두 살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여유도, 이 경험과 저 경험을 모두 해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도, 선택에 뒤따르는 실패를 감당할 만한 감정적 여유도 없는 사람의 고뇌를 일순간에 해방시켜주는 매혹적인 옵션이다."
이보다 가성비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샤오미를 대륙의 실수라며 찬양하고, 직구를 해가며 사대는 이유도 저게 아니던가. 부모님 집에 선물할 로봇청소기를 고르던 내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백색가전은 LG라며 반 삼성을 설파하던 내가 백만원에 달하는 LG 코드제로 R9 로봇 청소기 앞에서는 진상 소비자가 되어 이러니까 LG전자가 평생 2등인거라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결국 내 선택은 가격은 저렴하지만 LG에 준하는 성능으로 집안을 싹쓰리한다는 샤오미의 로봇청소기였다. 어머니는 로봇청소기가 강아지 같이 돌아다닌다며 귀여워하셨지만, 나는 그 청소기가 전혀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놓여있는 잡동사니들로 이리저리 헤메는 로봇청소기의 어쩔 수 없는 단점도 나에게는 그저 '가성비 청소기의 한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효심이 지극한 편은 아니지만,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었다. 돈을 쓰고도 불쾌한 감정이 들게 하는 가성비라는 마법의 물약은 우리가 노동소득에 의지하는 한 끝없이 우릴 죄어올 족쇄이기도 하다. 그런 단어에 대한 내 감정을 저렇게 한 줄로 설명해주니 속시원하기도 하고, 내 현실에 풀이 죽기도 했다.
이어진 맥시멀리즘에 대한 그의 경험도 재미있다. 미니멀리즘이 각광을 받고,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가는 요즘 우리는 처음부터 미니멀리스트가 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미니멀리스트는 물건을 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법정스님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최소한의 물건을 구비하려면, 내가 인생에서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소비의 우선순위를 세워야 하는데, 이는 결국 끝없는 소비를 통해 쌓을 수 있는 경험이다. 나는 맛있는 음식에는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 맛있는 술에는 꽤나 큰 비용을 지불한다. 내가 기네스를 평생 캔맥으로만 먹었다면 알 수 없었을 나의 취향이기도 하다. 검약에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 말도 꽤나 와닿는 표현이었다.
3. 기대하지 않아서 괜찮았던
내가 이런 에세이들의 서평을 쓸 때마다 인용하는 표현이 있다. '깊이'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글 재미있게 잘 썼는데 어쩌라는거냐. 그래서 당신이 정의한 우아한 가난은 대체 뭔데? 라고 괜히 삐뚤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성향은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있겠지만, 이 책은 서문으로 내 기대를 무너뜨렸다. 작가의 진심이 담긴 듯한 서문을 읽고 나니, 나도 날선 반응을 조금 거둬들이게 되었다. 자기계발을 좋아하고, 재테크 서적을 탐독하고, 경제적 자유를 소망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족을 위해 취향에도 큰 돈을 턱턱 쓰는 사람이나, 돈 한푼 더 모으려고 근검절약하는 사람이나 결국은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아하기 위해 가난하든, 미래의 풍요로움을 위해 가난하든, 우리는 가난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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