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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릭스/논픽션

선한 의미 그러나 차별적 해석, 『선량한 차별주의자』

by 북플릭스 2020. 8. 15.

#1 프롤로그

마음속에 꼭꼭 담아두고 있던 책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제목은 <냉정한 이타주의자>에서 따온 느낌이 강하긴 했지만요. 그러나 선량함과 차별, 두 단어가 가져온 묘한 어울림은 계속해서 제 머릿속에 남아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이 머릿속 책장에만 넣어두었던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사실 '차별'이라는 주제로 쓰여진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보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책 중 <말이 칼이 될 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홍성수 교수님의 식견과 혐오의 학문적 정의 등이 잘 드러난 이 책이 세상에 더 알려지지 않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많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등 일련의 이슈들이 사회안전망의 확보보다 남녀간의 갈등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고 아직 우리 사회가 차별을 사회적 현상이나 철학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도 있었구요.

 

그런데 작년에 출판된 이 책이, 이렇게 많이 팔리고 있다니! 대단한 충격 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나 봅니다. 제 판단은 아주 잘못된 것이었어요. 더군다나 많은 독서모임에서 이 책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얼른 이 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오늘도 장소는 커피빈입니다.


#2 일상속에 조용히 숨어있는 차별들

이 책이 의미는 저에게 '환기' 혹은 '깨달음' 이었습니다. 사회의 절대 다수가 누리고 있는 일상은 사실 누군가에게는 '특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순간의 생각은 다시 일상에 묻혀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상기시키지 않는다면 저처럼 다시 잊어버리곤 하죠. 이 책은 저에게 '차별'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이와 맞물려 최근 샘 오취리의 SNS 글을 통해 인종차별 논란이 수면위로 떠오르기도 했죠. 각종 포털 사이트의 관련 기사 댓글이나 여러 전문가들의 칼럼을 보면 '차별'은 아직도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긴 힘들어 보입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4735900

 

결국 사과한 샘 오취리…인종차별 문제 무딘 사회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강주희 인턴기자] 방송인 샘 오취리가 의정부고 학생들의 흑인 분장' 졸업사진에 불쾌감을 드러냈다가 비난 여론이 일자 사과했다. 학생들이 흑인을 비하할 의도가 없

news.naver.com

사실 저도 샘 오취리의 글을 보고서는 슬쩍 불쾌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의도가 없다면 사실 이런 밈은 유머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죠. 물론 의도가 없어도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준다면 철저하게 행위자의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고 보지만, 위 학생들의 행동은 흑인을 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닌 '관짝소년단' 이라는 유행을 패러디 한 것에 가깝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차별과 조롱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유튜브, 틱톡 등 여러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가 문화적으로 엮여있는 현 시대에서 이런 문제는 더 자주 발생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차별과 유머를 구분해야 할까요? 이렇게 일상에 뿌리깊게 녹아있는 차별적 언행들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와 같은 책들이 없다면 우리 일상에서 조용히 잊혀질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적극적인 자기검열로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아닐까요.


#3 그러나 아쉬운 편향과 깊이

도끼처럼 제 생각에 많은 흔적을 남겨주었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습니다. 단적인 예는 아이러니하게도 편향입니다. 김지혜 작가는 대학교에서 차별, 혐오 등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분입니다. 작품이 작가의 세계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죠. 그 때문인지 저자가 책에서 인용한 사례들과 그 분석들 중 다소 과장되거나 굴절되어 써내려간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남녀차별의 근거로 제시한 임금차이는 굉장히 1차원적인 연구를 인용했다고 봅니다. 남녀 임금차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어느 직군이 상대적으로 임금이 더 높은지 등이나 왜 그 직군에 특정 성별의 비중이 높은지 등이죠. 그런데 그런 요인들을 대부분 배제하고 임금의 차이를 단순히 문화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편향과 데이터 분석의 부재는 여러곳에서 눈에 띄는데요, 저자는 꾸준히 여러 전문가들의 이론과 용어를 인용하지만, 자신의 주장이나 현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소 무리하게 사용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는 철학서들을 인용할 때 더 두드러지는 것 같았어요. 최근 나오는 사회과학서적들 치고는 각주의 비중이 굉장히 높아 많은 자료를 분석했을거라 생각했는데, 넓이는 있되 깊이는 얉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점들이 다소 아쉽더군요.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 차별은 분명히 존재하는 개념이니까요. 사회현상을 아무리 깊게 분석한다 한들 그것이 주장의 탄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도 싶습니다.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관점이 문제겠지요. 이 책의 독자들이 평소 무심하게 저지르던 말과 행동을 스스로 돌이킬 수 있게 만든다면, 이 책은 소위 맡은바를 다 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의 말이 나와 기쁘게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 할 까 합니다.

 

평등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평등은 인간 조직이 정의의 원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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